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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먹먹했던 스위스 빈사의 사자상을 보며.. 본문
스위스 여행을 하면서 처참하게 창에 찔려 죽음을 맞이한 스위스 용병을 상징하는 빈사의 사자상을보며
가슴 먹먹했던 여운이 남아 스위스 용병에 대한 역사를 좀 더 알아보고자 한다.
라이슬로이퍼( Reislaufer ) : 스위스 출신의 용병
근세(Early Modern period)부터 계몽시대(European Enlightenment)가 포함된 중세 후기(Later Middle Ages)까지 외국, 특히 프랑스에 고용되어 전력으로 활용된 병사들로 유명.
그들의 용병으로써의 전력은 르네상스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으며 전장에서 증명된 전투력은 이후에도 세계 최고의 용병으로 자리매김 하고있다.
[ 스위스 용병의 위상 ]
중세 후기 용병전력은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과 기타 분쟁들을 겪어온 베테랑들로써, 한시적 복무가 아닌 직업적 군인으로 유럽 각국에서 중요하게 평가받았고, 스위스 지방정부에 의뢰만 하면 언제든지 준비된 스위스 용병단을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특히 매력적인 요소였다.
스위스 용병(Reisläufer)은 장창(pike)과 핼버드(halberd)를 이용한 결연한 집단 공격력 덕분에 중세 후기에 그 전력 가치를 인정받았다.
스위스 용병은 상당히 긴 파이크를 들고 거대한 종대(columns)를 구성해 머리를 밀치는 공격 전술과 포로를 사로잡는걸 원치 않는 거침없는 승리의 행진은 무서운 공포와 경외를 불러일으켰다.
젊은이들은 전장에 싸우러 나갔고 때로 죽기도 하였지만 외국에서의 복무는 많은 동기를 유발하였는데, 농업에만 의존하는 낙후된 스위스보다는 경제적으로 나았기 때문에, 또는 모험심으로, 혹은 스위스 용병이라는 자부심과 두 세기에 걸쳐 축적된 전투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사랑으로 이들은 끊임없이 용병으로 나아갔다.
[ 이탈리아 전쟁과 란츠크네흐트 ]
약 1490년까지 스위스는 창을 사용하는 용병을 독점으로 공급하다시피 하였으나 이후 유사 독일 용병 란츠크네흐트(Landsknechts) 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용병들은 스위스 용병의 전술에 숙달되었고 점차 유럽 각지에 진출했지만 스위스 용병과 가공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고용하기가 쉬웠다.
1515년 스위스가 중립을 선포한 뒤 스위스 용병들이 왕립 프랑스군에서만 일하게 된 반면, 란츠크네흐트들은 돈만 준다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Holy Roman Emperor)의 적에게라도 고용되어 싸웠으며, 심지어는 스위스 용병들도 거부한 전장에서 동포끼리 싸우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스위스는 이 모방을 칭찬하지 않았고 이 두 용병단은 고용에서, 그리고 전장에서 극한의 경쟁상대가 되었다. 이들은 16세기 초, 대 이탈리아전쟁(Great Italian Wars)에서 주요 국가의 분쟁기간 서로 자주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스위스는 보통 "창으로 밀어붙이는 전술"(push of pike)을 사용했지만 전투 결과는 야만적이고 참혹함 그 자체였고, 이탈리아인들은 무시무시한 수의 사상자들을 낳은 "나쁜 전쟁"(bad war)이라고 불렀다.
란츠크네흐트와의 경쟁, 그 뒤 스위스 용병을 모방한 기타 군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용병의 가치는 1480년에서 1525년 사이에 정점에 달했다. 특히나 노바라 전투(Battle of Novara)의 경우 거의 완벽한 스위스 용병의 승리였다. 비록 1515년의 끔찍한 마리냐노 전투 (Battle of Marignano)에서는 거의 패배에 가까운 결과를 낳았지만 광포한 전투력과 질서정연한 퇴각은 여전히 찬사를 불러왔다.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식 전술이 더이상 먹혀들지 않았고 결국 스위스의 두 세기간에 걸친 빛나는 전력은 비코카 전투 (Battle of Bicocca)에서 재앙으로 종결되었다.
비코카에서의 끔찍한 타격으로 스위스 용병들의 전투력은 이후 수년간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고 3년 뒤 세기의 격전이었던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에서 보여준 전투력은 평범함 그 자체로 스위스 용병의 내리막길이 되었다.
[ 파비아 전투 이후 ]
1525년경 맞이한 황금시 대의 종언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창병들은 16세기 유럽의 전장에서 주요 보병 전력으로 계속 활용프랑스 종교전쟁(French Wars of Religion)중에 그들의 명성을 다시한번 입증하였는데, 특히나 드뢰 전투(Battle of Dreux)에서 스위스 용병들은 전체 위그노(Huguenot) 군대를 저지하여 가톨릭(Catholic) 기병대의 역습을 가능하도록 한 공로를 세웠다.
[ 프랑스 군대에서의 근무 ]
스위스 용병들은 17세기부터 19세기 동안에는 많은 국가들에 고용되었으나 가장 많은 수는 프랑스로 보병 전력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프랑스에 고용된 13개 스위스 용병 연대중 가장 유명한 스위스 근위대 연대(Swiss Guard regiment)는 프랑스 위병들의 파란색 군복과 구별되는 빨간색 복장을 착용하였다. 17세기 이후로 스위스 용병들은 점차 그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장창을 버리고 프랑스의 다른 부대들과 마찬가지로 화승총으로 무장하였다.
끝까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스위스 위병들은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 당시 성난 폭도들로부터 이미 튈르리 궁전(Tuileries Palace)에서 달아난지 오래인 국왕 루이 16세(Louis XVI)를 수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모두 살해되었다.
※ 스위스 루체른(Luzern)에 있는 ‘빈사의 사자상’은 1792년 튈르리 궁전에서 프랑스 혁명군을 상대로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멸한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석상이다.
😭 창에 찔려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늙은 사자의 모습이 최후 스위스 용병의 자화상이라네요 😭
[ 스페인 군대에서 근무 ]
16세기 이후 스위스 용병들을 애용한 또다른 국가는 스페인이었다.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이후 스위스는개신교(Protestant)를 추종하는 주들과 가톨릭을 추종하는 주들로 나뉘었다. 가톨릭을 추종하는 주 출신의 용병들은 16세기 이후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군대에 점차 많은 수가 고용되었다.
스페인에서의 이들의 마지막 임무는 프랑스에 대한 반도 전쟁(Peninsular War)이었으며 끝까지 책임을 다한 6개 스위스 용병 연대가 수년간의 전투끝에 쓰러져갔다. 1823년 스페인에서의 스위스 용병들은 이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복무한 스위스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복무한 스위스 용병들도 자신들의 전술과 복식을 사용하였다.
[ 현대 ]
1859년 이후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단 하나의 용병부대인 바티칸 근위병(Vatican's Swiss Guard)만을 운용
이들은 5세기 동안 교황을 수호하였으며 스위스 용병들의 전성기를 상기시키는 다채로운 복장을 하고 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이제는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외국의 군대에 복무하고 있으며 스페인 내란(Spanish Civil War) 당시에도 주로 공화파 군대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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